글-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제2부 · 왕국의 심장
마흔두 번째 이야기 : 왕국이 시작되기 전의 역사
“역사는 살아남은 사람이 기록한다. 진실은 살아남지 못한 사람이 남긴다.”
1. 금서가 열린 밤
종소리는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울림은 끝나지 않았다.
왕좌 아래 심연의 천장은 잔잔한 호수처럼 흔들렸고, 공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글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한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계단 위에서 내려오던 흰 망토의 인물은 마지막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얼굴은 여전히 소녀였다.
미궁에서 만났던 금빛 눈동자의 아이와 똑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아이가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왔고, 손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책 표지는 검게 바래 있었지만 중앙의 금빛 문장은 선명했다.
『왕국이 시작되기 전의 역사』
시간을 먹는 자가 처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 책은 봉인됐어야 한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책을 펼쳤다.
순간 심연의 공기가 뒤집혔다.
모든 시계가 동시에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도현은 이를 악물었다.
“눈 감아!”
한은 늦었다.
첫 페이지를 본 순간, 눈앞 세상이 무너졌다.
2. 왕국이 없던 시대
눈을 떴을 때.
한은 풀밭 위에 서 있었다.
왕성도 없었다.
성벽도 없었다.
심연도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멀리 거대한 나무 하나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너무 거대해서 줄기만 산맥 같았다.
가지 끝은 별들 사이로 뻗어 있었다.
“…시간나무.”
한이 중얼거리자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지.”
“그럼 원래 이름은?”
소녀는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기록수(記錄樹).”
“기록… 수?”
“세상의 모든 시간을 기록하는 나무.”
바람이 불었다.
잎이 흔들릴 때마다 수많은 소리가 들렸다.
아기의 웃음.
노인의 마지막 숨.
비 오는 날의 발소리.
누군가의 고백.
누군가의 눈물.
한은 귀를 막았다.
“이게 다 뭐야?”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소녀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조용했다.
“세상은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았어.”
“기록했어.”
3. 시간을 심는 사람들
나무 아래 사람들이 있었다.
백여 명 남짓.
왕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었다.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어린아이도 있었다.
노인도 있었다.
그들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빛나는 열매를 받아 땅에 묻고 있었다.
열매를 묻은 자리에서 작은 나무가 자랐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 마을 하나가 생겨났다.
“마을이…”
“시간으로 자란다.”
소녀가 말했다.
“모든 생명은 시간을 심어서 태어났어.”
한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야?”
“흐르기도 하고.”
“자라기도 해.”
한은 기록수 아래에서 한 남자를 발견했다.
키가 컸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아린.”
“초대 왕?”
소녀는 천천히 말했다.
“첫 번째 후계자.”
4. 아린이라는 이름
아린은 왕관이 없었다.
검도 없었다.
손에는 작은 나무삽 하나뿐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열매를 묻고 있었다.
누군가 웃으면 같이 웃었다.
누군가 넘어지면 먼저 달려갔다.
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은 이상함을 느꼈다.
“벽화 속 왕이랑 전혀 다른데.”
“당연하지.”
소녀가 웃었다.
“벽화는 나중에 그려졌으니까.”
그때 하늘이 어두워졌다.
새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기록수의 잎들이 갑자기 검게 변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또 왔다!”
멀리 검은 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다.
안개 속에는 얼굴이 없었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었다.
검은 손들이 땅을 긁으며 올라왔다.
한은 몸이 굳었다.
심연에서 봤던 손들.
똑같았다.
5. 시간을 훔치는 존재
아린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손에는 아무 무기도 없었다.
검은 안개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아이들을 뒤로 숨겼다.
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기록은 끝나야 한다.”
아린이 대답했다.
“왜 시간을 먹는 거지?”
“시간은 기록되면 멈춘다.”
“거짓말.”
“흐르는 시간만이 자유다.”
안개가 기록수 뿌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나무에서 금빛 빛줄기 하나가 떨어졌다.
빛은 아린의 손으로 들어갔다.
손바닥에 붉은 문양이 생겼다.
한은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
똑같은 문양이었다.
“왕인의 인장…”
소녀가 조용히 말했다.
“처음 생긴 날이야.”
6. 첫 번째 선택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린은 안개를 베지 않았다.
손을 기록수 줄기에 올렸다.
나무 전체가 빛났다.
검은 안개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아이들이 뛰어갔다.
하지만 아린은 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한이 묻자 소녀가 말했다.
“인장은 시간을 쓰는 힘이야.”
“대가가 있어.”
“생명?”
“존재.”
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린의 그림자가 조금 옅어졌다.
7. 두 번째 거짓말
장면이 빠르게 흘렀다.
계절이 수십 번 바뀌었다.
기록수는 더 커졌다.
사람도 많아졌다.
도시가 생겼다.
그리고….
탑 하나가 세워졌다.
왕성이었다.
한은 눈을 크게 떴다.
“왕성이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었네.”
“없었지.”
소녀가 말했다.
“사람들이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왜 왕이 생긴 거야?”
소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슬퍼졌다.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했어.”
“무엇을?”
“죽음을.”
그 말과 동시에.
늙은 노인 하나가 기록수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열매 하나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노인의 몸은 빛이 되어 나무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울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했다.
“죽지 않는 방법은 없습니까?”
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8. 왕이 된 후계자
아린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기록수 앞에서 선언했다.
“시간을 나누겠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기록수가 흔들렸다.
잎들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역사가 갈라져.”
“무슨 뜻이야?”
“후계자가 왕이 되는 순간.”
한은 숨을 삼켰다.
“그게 잘못이었어?”
“후계자는 기록을 지키는 존재였어.”
“왕은 시간을 가지려는 존재가 되었고.”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왕관이 아린의 머리에 씌워졌다.
그 순간 기록수 줄기에 금이 갔다.
한 줄기.
아주 작은 금.
하지만 금 사이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9. 금서의 마지막 페이지
장면이 사라졌다.
한은 다시 왕좌 아래 심연으로 돌아왔다.
숨이 거칠었다.
책은 아직 열려 있었다.
하지만 페이지는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곳에는 글자가 없었다.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피는 한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피가 페이지에 닿자 문장이 나타났다.
후계자가 왕이 되는 날.
세상은 처음으로 시간을 잃는다.
한은 책장을 넘기려 했다.
하지만 넘겨지지 않았다.
소녀가 손을 막았다.
“아직 읽으면 안 돼.”
“왜?”
“다음 장은.”
소녀의 금빛 눈동자가 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가 숨긴 이야기니까.”
순간 도현이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책을 닫아!”
도현의 얼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늦었다.
책이 스스로 다음 장을 넘겼다.
페이지 한가운데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이도현은 왕을 죽였다.』
심연 전체가 흔들렸다.
한의 시선이 천천히 아버지에게 향했다.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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