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 제2부 「왕국의 심장」
마흔한 번째 이야기 : 왕국의 심장 (1)
“심장은 피를 흐르게 한다. 왕국의 심장은 시간을 흐르게 한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침묵은 소리가 없는 곳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소리가 동시에 멈춘 순간 태어난다.
왕국의 심장이 멈춘 그 순간이 그랬다.
한은 숨을 들이마시려 했다.
그러나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왕국의 심장 대신.
가슴속에서 묵직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쿵.
그 울림이 몸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흔들었다.
왕좌 아래 거대한 동굴.
천장에 매달린 수정들이 동시에 붉게 빛났다.
갈라진 심연 속 검은 안개가 뒤집히듯 솟구쳤다.
그리고 광장에 멈춰 있던 사람들, 숲의 새들, 왕성의 시계탑….
왕국 전체가 같은 박동으로 한 번 흔들렸다.
도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
그가 달려오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도현을 뒤로 밀어냈다.
모래로 이루어진 그의 팔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시간을 먹는 자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예언이… 시작됐다.”
붉은 문양
한의 가슴이 뜨거웠다.
옷을 찢듯 갑옷을 열어젖기자 피부 위로 붉은 문양이 떠올랐다.
동그란 원.
그 안을 가르는 열두 개의 선.
그리고 중심에는 작은 눈 하나.
도현이 숨을 삼켰다.
“…왕인의 인장.”
“왕인의 인장?”
“초대 왕도… 아니.”
도현은 말을 멈췄다.
“초대 후계자에게 새겨졌던 문양이다.”
한은 손으로 문양을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끝이 닿을 때마다 문양 속 선들이 움직였다.
시계바늘처럼.
열두 개의 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한.
귓가였다.
아니었다.
머릿속이었다.
아니.
심장 안이었다.
심장의 기억
눈앞 풍경이 사라졌다.
한은 끝없는 붉은 바다 위에 서 있었다.
하늘도 붉었다.
바닥도 붉었다.
파도처럼 움직이는 것은 물이 아니라 수천억 개의 빛이었다.
빛 하나마다 장면이 있었다.
누군가 태어나는 순간.
누군가 죽는 순간.
누군가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누군가 검을 드는 순간.
시간이었다.
“여기가…”
“심장의 기억.”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한이 돌아보았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새하얀 옷.
검은 머리.
그리고 눈동자는 금빛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 아이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너는 누구야?”
아이는 대답 대신 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늦었어.”
“…뭐?”
“왕국이 너무 오래 버텼어.”
이름을 잃은 아이
“이름이 뭐야?”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
잠시 생각하더니 슬프게 웃었다.
“잊어버렸어.”
한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말을 방금 들었다.
이전 후계자도 이름을 잃었다.
“너도 후계자야?”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후계자가 아니야.”
“그럼?”
“왕국.”
순간 주변 붉은 바다가 거칠게 흔들렸다.
“나는 왕국의 심장이야.”
심장은 살아 있었다
한은 믿을 수 없었다.
“왕국 심장이 사람이라고?”
“원래는 사람이 아니었어.”
아이는 손을 붉은 바다에 담갔다.
파도가 갈라졌다.
안에서 거대한 나무가 나타났다.
뿌리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줄기 안에는 빛이 흐르고 있었다.
“왕국은 이 나무에서 시작됐어.”
“생명의 나무?”
“시간나무.”
나무 열매마다 작은 시계가 달려 있었다.
열매가 떨어질 때마다 한 사람이 태어났다.
꽃이 질 때마다 누군가 죽었다.
한은 넋을 잃었다.
“그럼 시간은…”
“자라나는 거야.”
첫 번째 왕의 죄
나무 밑동에 사람이 있었다.
왕관을 쓴 남자.
벽화 속 초대 왕이었다.
그는 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를 베고 있었다.
“안 돼!”
한이 외쳤다.
하지만 장면은 과거였다.
검이 나무를 꿰뚫었다.
붉은 빛이 하늘로 폭발했다.
시간이 산산조각 났다.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날 왕국 시간이 태어났어.”
“나무를 베서?”
“아니.”
“시간을 훔쳐서.”
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훔친 시간
장면이 바뀌었다.
초대 왕은 나무 심장 하나를 꺼냈다.
사람 심장만 한 붉은 결정.
그 심장을 왕좌 아래 묻었다.
“왕국 사람들은 늙지 않았어.”
“병도 적었고.”
“풍년이 계속됐고.”
“전쟁에서도 이겼어.”
아이는 계속 말했다.
“모두 시간을 빌렸기 때문이야.”
“누구에게?”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가리켰다.
붉은 하늘이 갈라졌다.
그 너머에는….
끝없는 검은 숲.
그리고 그 숲 한가운데.
잘려나간 거대한 나무 그루터기.
왕국 밖
“저게…”
“왕국 밖.”
한은 멈춰 섰다.
“왕국 밖 세상이 있다고?”
아이가 처음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몰랐어?”
“왕국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아이는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이상하게 슬펐다.
“왕국은 감옥이야.”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감옥?”
“시간을 훔친 사람들을 가둔.”
도현의 기억
한은 현실로 돌아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도현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괜찮냐?”
“…아버지.”
“무슨 봤어?”
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국은 감옥이래.”
순간.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시간을 먹는 자도 고개를 들었다.
둘 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도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아이를 만났구나.”
“누구냐고요.”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를 숙여 바닥에 손을 얹었다.
“이제 숨길 수 없군.”
왕좌 아래 바닥이 열렸다.
처음 보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아래가 아니라….
위로 이어지고 있었다.
천장을 향해.
아무 끝도 없이.
마지막 장면
계단 끝에서 작은 종 하나가 울렸다.
딸랑.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흰 망토를 입은 사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에는 오래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책 표지에는 금빛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왕국이 시작되기 전의 역사』
시간을 먹는 자가 처음으로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책은… 존재하면 안 된다.”
흰 망토의 인물이 천천히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왕국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은 숨을 멈췄다.
그 얼굴은….
미궁에서 만났던 금빛 눈동자의 여자아이와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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