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서른일곱 번째 이야기 : 시간을 먹는 자
“미궁은 길을 잃게 만드는 곳이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만드는 곳이다.”
한은 자신이 몇 걸음을 걸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분명 미궁 안으로 들어온 것은 몇 분 전이었다. 그런데 몸은 피곤했고, 숨은 마치 하루 종일 달린 사람처럼 거칠었다.
뒤를 돌아봤다.
들어왔던 문이 사라져 있었다.
돌벽만 남아 있었다.
“…말도 안 돼.”
그 순간,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발자국은 앞으로 향하지 않았다.
모두 미궁 안쪽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 나온 흔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으로 이곳에서 나왔던 것처럼.
시간을 잃은 방
복도 끝에는 둥근 방 하나가 있었다.
천장에는 시계가 수백 개 매달려 있었다.
모두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3시.
정오.
해 질 녘.
그리고 어떤 시계는 숫자가 거꾸로 움직이고 있었다.
방 중앙에는 거대한 모래시계 하나.
하지만 모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이 다가가자 모래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다.”
“누구야?”
“아니… 너무 일찍 왔다.”
목소리는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달랐다.
아이의 목소리.
청년의 목소리.
노인의 목소리.
모두 한 사람처럼 겹쳐졌다.
시간을 먹는 자
모래시계가 갈라졌다.
안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걸어 나왔다.
얼굴이 없었다.
대신 수많은 시계바늘이 얼굴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 시간이 흔들렸다.
한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길어졌다가 다시 짧아졌다.
손등에는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숨도 빨라졌다가 느려졌다.
“네가…”
형체가 웃었다.
시계바늘들이 동시에 멈췄다.
“사람들은 나를 시간을 먹는 자라고 부른다.”
“시간을… 먹는다고?”
“아니.”
잠시 침묵.
“너희가 버린 시간을 내가 먹는다.”
순간 방 안이 변했다.
수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어릴 적 하지 못했던 말.
후회했던 선택.
포기했던 꿈.
잊어버린 이름.
모든 장면이 모래가 되어 검은 존재에게 흘러 들어갔다.
“저건… 내 기억…”
“기억은 시간의 그림자다.”
“돌려줘!”
“돌려받고 싶은가?”
형체가 손을 펼쳤다.
손 위에는 작은 모래알 하나.
“이 모래 하나가 네가 잊은 하루다.”
금지된 거래
“방법이 있어.”
시간을 먹는 자가 말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한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대신.”
모래알이 두 개가 되었다.
“미래의 시간을 내놓아라.”
“무슨 뜻이지?”
“열흘을 돌려받으면 열흘을 잃는다.”
“언제?”
“모른다.”
“그게 거래야?”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거래된다.”
순간 한은 깨달았다.
미궁에 들어왔던 사람들.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잃었다.
기억.
수명.
사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미궁의 진실
벽 하나가 갈라졌다.
안에는 거대한 지도.
왕국 전체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도 위에는 도시가 아니라 시간의 균열이 표시되어 있었다.
붉은 균열은 모두 같은 곳으로 이어졌다.
왕성.
그리고 왕성 한가운데.
왕좌.
“왕좌가…”
시간을 먹는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다.”
“왕은 시간을 봉인하는 존재였다.”
한의 심장이 멈춘 듯 뛰었다.
“봉인?”
“왕좌 아래에는 문이 있다.”
“무슨 문?”
이번에는 시간이 멈췄다.
모든 시계바늘이 12를 가리켰다.
모래가 공중에 멈췄다.
그리고 존재가 처음으로 얼굴 없는 얼굴을 한에게 가까이 가져왔다.
“열리지 말았어야 하는 문.”
마지막 장면
한이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순간.
발밑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새겨진 문양이 빛났다.
수백 개 시계가 동시에 깨졌다.
검은 존재가 처음으로 놀란 목소리를 냈다.
“안 돼.”
모래가 거꾸로 폭발했다.
그리고 한은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미궁 밖으로 던져졌다.
눈을 뜬 곳은 미궁 입구.
밖은 밝은 아침이었다.
하지만 입구 앞 나무는 모두 거목이 되어 있었다.
덩굴은 성벽만큼 굵어져 있었고,
돌계단은 절반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
미궁 앞에 세워져 있던 석비에는 새로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입장일 : 왕력 842년.”
한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들어올 때 없던 작은 모래알 하나가 손바닥에 있었다.
그 모래알 안에서 아주 작은 시계바늘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석비 아래에는 누군가 방금 새긴 듯한 문장이 있었다.
“왕력 857년. 마지막 후계자가 다시 돌아왔다.”
한은 숨을 멈췄다.
미궁 안에서는 몇 분이었다.
밖에서는… 15년이 흘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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