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제2부 · 왕국의 심장
마흔다섯 번째 이야기 : 왕국 밖의 세계
“가장 견고한 감옥은 벽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그것뿐이라고 믿는 기억으로 만들어진다.”
1. 검은 상자가 열리다
심연은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붉은 호수 위로 솟아오른 검은 나무 상자는 흔들림조차 없었다.
누구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시간을 먹는 자가 낮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봉인할 수 있다.”
도현도 같은 말을 했다.
“한, 열지 마라.”
아르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는 처음 보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한은 세 사람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왜 다들 같은 말을 하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답이었다.
한은 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상자는 나무처럼 따뜻했다.
손을 올리는 순간 붉은 문양이 빛났다.
찰칵.
잠금장치가 스스로 풀렸다.
상자가 천천히 열렸다.
안에는 예상했던 보물도, 무기도 없었다.
오래된 양피지 한 장.
그리고 손바닥만 한 나침반 하나.
나침반에는 동서남북 대신 네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 밖.
한이 나침반을 드는 순간 바늘이 미친 듯 회전했다.
그리고 천천히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밖.
2. 지도가 살아 움직이다
양피지를 펼치자 아무것도 없었다.
새하얀 종이뿐이었다.
“빈 지도잖아.”
한이 중얼거리자 종이 위로 붉은 점 하나가 생겼다.
점은 선이 되었다.
선은 강이 되고 산맥이 되고 숲이 되었다.
순식간에 거대한 지도가 완성됐다.
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시간을 먹는 자도 놀란 표정이었다.
“사라졌던 원본 지도.”
왕국에서 보던 지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왕국은 한가운데 아주 작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 밖에는 끝없이 넓은 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숲.
사막.
바다.
수많은 도시.
왕국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한은 숨을 삼켰다.
“왕국이 이렇게 작은 곳이었다고?”
아르아가 조용히 말했다.
“너희는 항상 작은 창문으로만 세상을 봤으니까.”
3. 사라진 길
지도 한쪽 구석에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왕국 밖으로 나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붉은 선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좌 아래 심연.
시간의 미궁.
그리고 왕국 북쪽 끝.
‘회색 절벽.’
한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회색 절벽?”
도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국 지도에는 없는 곳이다.”
“왜?”
“왕이 지웠으니까.”
“지도를 지웠다고요?”
도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왕국 사람들은 북쪽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배운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이 있다.”
4. 기억을 지우는 안개
아르아가 손을 들어 지도를 만졌다.
회색 절벽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저게 경계야.”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은 모두 이 안개를 만나.”
“안개를 지나면?”
“길을 잃는다.”
“죽는 거야?”
“아니.”
아르아는 한을 바라봤다.
“왕국으로 돌아온다.”
“기억을 잃은 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간의 미궁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사람들.
“그 안개가 기억을…”
“왕국을 감옥으로 만드는 마지막 자물쇠야.”
5. 첫 번째 탈출자
시간을 먹는 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명은 성공했다.”
모두 그의 쪽을 바라봤다.
“누가요?”
“370년 전.”
지도 위에 작은 빛 하나가 나타났다.
젊은 여자였다.
왕인의 문양을 가진 후계자.
그녀는 안개를 지나 절벽 끝에 도착했다.
그리고…
푸른 하늘 아래로 걸어 나갔다.
“이 사람이…”
“첫 번째 탈출자.”
“살아 있었어요?”
시간을 먹는 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지 않았을 뿐.”
한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럼 밖에도 후계자가 있는 거네요?”
시간을 먹는 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다시 불길했다.
6. 왕이 지운 이름
지도 아래 구겨진 부분을 펴자 이름 하나가 나타났다.
세이라.
도현이 숨을 멈췄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왕이 가장 먼저 지운 이름이다.”
세이라는 아린의 여동생이었다.
후계자였고.
왕국을 떠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편지 하나를 남겼다.
양피지에 글자가 떠올랐다.
‘밖에는 시간이 흐른다. 왕국에서는 시간이 순환한다.’
한은 몇 번이고 그 문장을 읽었다.
“순환한다고?”
아르아가 바닥에 원 하나를 그렸다.
“왕국의 시간은 원이야.”
“밖의 시간은 직선.”
“그래서 왕국은 같은 비극을 반복해.”
“실패한 후계자가 계속 생긴 것도…”
“순환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7. 도현의 비밀 지도
도현은 갑자기 갑옷 안쪽에서 또 하나의 종이를 꺼냈다.
낡고 찢어진 지도였다.
왕국 지도였다.
그런데 북쪽 끝에 작은 표시가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붉은 점.
“아버지…”
“15년 동안 찾았다.”
“회색 절벽?”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을 죽인 뒤.”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고 있었어.”
“그런데 왜 안 갔어요?”
도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왕인의 인장이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한을 바라봤다.
“문은 너만 열 수 있다.”
8. 심연이 흔들리다
그 순간 심연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붉은 호수에 파문이 퍼졌다.
나침반 바늘이 갑자기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글자가 사라지고.
단 하나의 글자만 남았다.
밖.
동시에 심연 벽에서 금이 갔다.
검은 안개가 쏟아져 들어왔다.
시간을 먹는 자가 얼굴을 굳혔다.
“늦었다.”
“무슨 말이야?”
“누군가 문이 열렸다는 걸 알아챘다.”
안개 속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
두 사람.
열 사람.
수백 사람.
하지만 발소리는 하나처럼 울렸다.
9. 검은 기사들
안개가 갈라졌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걸어 나왔다.
얼굴은 모두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가면에는 왕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과 똑같은 문양.
도현이 검을 뽑았다.
“…봉인 기사단.”
시간을 먹는 자가 중얼거렸다.
“왕이 만든 마지막 군대.”
한이 놀랐다.
“왕은 죽었잖아요.”
“왕은 죽었다.”
도현이 말했다.
“하지만 명령은 살아 있다.”
가장 앞의 기사가 검을 뽑았다.
검은 칼날이 붉은 빛을 삼켰다.
그는 한을 향해 검끝을 겨눴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370번째 후계자.”
“왕국의 명령에 따라 체포한다.”
한은 얼어붙었다.
“나를?”
“죄목.”
기사는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
‘왕국 밖으로 나가려 한 죄.’
마지막 장면
검은 기사들이 동시에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수십 자루 검이 한을 향해 겨눠졌다.
그 순간 아르아가 한의 앞을 막아섰다.
금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눈부신 빛을 뿜었다.
심연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한.”
“도망쳐.”
“회색 절벽까지는 내가 시간을 멈춰 줄게.”
하지만 그녀의 발끝부터 천천히 돌처럼 굳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을 멈추는 대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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