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제2부 · 왕국의 심장
마흔일곱 번째 이야기 : 회색 절벽의 문지기
“문을 지키는 사람은 적을 막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을 보내는 사람이다.”
1. 절벽 위의 두 하늘
바람 냄새가 달랐다.
한은 그 차이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왕국의 바람은 늘 차갑고 쇠 냄새가 났다. 오래된 성벽과 은빛 하늘의 냄새.
그러나 절벽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흙과 풀, 햇빛 냄새를 품고 있었다.
살아 있는 냄새였다.
푸른 망토의 여인은 절벽 끝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 펼쳐진 하늘은 푸르렀고, 한의 뒤에는 은빛 왕국이 있었다.
마치 세상이 둘로 나뉜 것 같았다.
“세이라...”
한이 이름을 되뇌자 그녀가 웃었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또 생겼네.”
“당신이 첫 번째 탈출자입니까?”
“왕국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세이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는 나를 첫 번째 귀환자라고 불러.”
한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귀환자?”
“나는 밖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야.”
그녀는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왕국에서 태어나 밖으로 나간 첫 번째 사람이기도 하고...”
잠시 침묵.
“밖에서 다시 왕국으로 돌아온 첫 번째 사람이기도 해.”
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돌아왔다는 건...”
“문을 다시 열었다는 뜻이지.”
2. 봉인 기사단은 절벽을 넘지 못한다
뒤쪽에서 검은 갑옷들이 멈춰 섰다.
봉인 기사단은 절벽 가장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검을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앞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세이라가 손가락으로 절벽 바닥을 가리켰다.
“잘 봐.”
한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공중으로 이어진 돌계단 사이사이에 희미한 글자들이 떠 있었다.
글자가 아니라 문장이었다.
수천 개의 문장이 공중에 새겨져 있었다.
기억은 건널 수 있다.
욕망은 건널 수 없다.
이름을 가진 자만 길을 본다.
왕은 통과할 수 없다.
세이라가 말했다.
“이 계단은 돌로 만든 길이 아니야.”
“그럼?”
“맹세로 만든 길.”
한은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돌이라고 생각했던 계단은 수많은 글자가 서로 얽혀 만든 문장이었다.
“글...”
“그래.”
세이라가 미소 지었다.
“왕국의 마지막 비밀.”
“세상은 글로 만들어졌어.”
3. 글을 잃은 왕국
한은 숨을 삼켰다.
“글... 왕국?”
세이라는 절벽 가장자리의 오래된 비석을 쓰다듬었다.
비석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그녀가 손을 올리자 문장이 떠올랐다.
글은 시간을 붙잡는다.
이름은 존재를 붙잡는다.
“왕국 사람들은 왜 이걸 몰라요?”
“왕이 지웠으니까.”
세이라는 비석에서 손을 떼었다.
“원래 왕국 사람들은 태어날 때 자신의 이름을 직접 썼어.”
“직접?”
“이름을 쓰는 순간 존재가 기록됐지.”
“그래서 이름을 잃으면...”
“존재도 희미해져.”
한은 실패한 후계자들과 봉인 기사단을 떠올렸다.
그들은 이름을 잃었다.
그래서 명령만 남았다.
세이라가 조용히 덧붙였다.
“왕은 사람들에게 이름 대신 번호를 주기 시작했어.”
왕력.
후계자 번호.
기사단 번호.
모든 것이 숫자가 되었다.
“숫자는 관리하기 쉽거든.”
4. 도현이 숨긴 마지막 수업
도현이 세이라를 바라봤다.
“네가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
세이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네가 왕을 죽일 줄은 몰랐고.”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둘이 아는 사이예요?”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스승은 시간을 먹는 자였고.”
“세이라는 내 선배였다.”
한은 놀랐다.
“선배?”
“후계자는 혈통이 아니라 계승이야.”
세이라는 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현은 마지막까지 왕이 되기를 거부한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믿었지.”
“하지만 너를 미궁으로 보낸 건... 아직도 용서하지 못해.”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5. 회색 절벽의 문지기
절벽 끝에는 작은 오두막 하나가 있었다.
너무 평범해서 처음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세이라는 문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책들이 가득했다.
수천 권이었다.
책등에는 모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윤.
아린.
세이라.
이도현.
그리고...
한.
한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집어 들었다.
아직 빈 책이었다.
첫 장만 적혀 있었다.
왕력 842년. 시간의 미궁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 페이지는 새하얬다.
“내 미래예요?”
“아직 기록되지 않은 시간.”
세이라가 말했다.
“밖에서는 미래가 비어 있어.”
“왕국에서는 미래가 이미 쓰여 있고.”
한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예언이...”
“왕국 안에서만 가능한 이유야.”
6. 첫 번째 규칙
세이라는 책장 하나를 열었다.
숨겨진 방이 나타났다.
방 한가운데 거대한 원탁.
원탁 위에는 세계지도가 놓여 있었다.
왕국보다 훨씬 거대한 세계.
대륙이 일곱 개였다.
바다도 셋이었다.
도시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게 진짜 세계야.”
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이라는 손가락으로 왕국을 가리켰다.
정말 작은 섬처럼 표시되어 있었다.
“왕국의 이름은 원래 왕국이 아니야.”
“그럼?”
“기록의 정원.”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한의 가슴 문양이 빛났다.
“왜 반응하지?”
세이라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그녀는 한의 손목을 붙잡았다.
붉은 문양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열두 개의 선이 아니라.
열세 개.
7. 존재하지 않는 후계자
세이라가 뒤로 물러났다.
“말도 안 돼.”
도현도 문양을 보고 창백해졌다.
“열세 번째 인장...”
“그게 뭔데요?”
세이라는 천천히 말했다.
“후계자는 원래 열두 명이야.”
“열세 번째는 없어.”
“그런데 내 문양은…”
“생긴 적이 없어.”
오두막 안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세이라는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냈다.
제목은 없었다.
첫 페이지에 단 하나의 문장.
열세 번째 후계자가 태어나면 왕국의 순환은 끝난다.
도현이 처음으로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
“예언서…”
“불태운 줄 알았는데.”
세이라가 조용히 말했다.
“불태운 건 사본이었어.”
8. 봉인 기사단의 진짜 목적
밖에서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봉인 기사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벽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모두 무릎을 꿇었다.
한 명이 투구를 벗었다.
얼굴은 없었다.
안개 속에서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명령 변경.”
세이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럴 리가…”
기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370번째 후계자를 체포하지 않는다.”
한은 숨을 멈췄다.
“그럼?”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370번째 후계자를... 제거한다.”
검은 갑옷들이 동시에 검을 땅에 꽂았다.
절벽 아래에서 검은 빛 기둥이 솟구쳤다.
공중 계단의 문장들이 하나둘 지워지기 시작했다.
세이라가 외쳤다.
“안 돼!”
“문장을 지우고 있어!”
마지막 장면
절벽 전체가 흔들렸다.
한의 발밑 계단 하나가 사라졌다.
아래는 끝없는 구름이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거대한 검은 탑 하나가 떠올랐다.
탑 꼭대기에는 은빛 왕관을 쓴 인물이 서 있었다.
분명 죽은 왕이었다.
그가 절벽 너머 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현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죽은 것은 내 몸뿐이다.”
왕관이 붉게 빛났다.
한의 가슴 문양도 동시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왕이 웃었다.
“열세 번째 후계자여.”
“이제 내 왕좌를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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