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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설 & 창작소/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마흔여덟 번째 이야기 : 죽지 않은 왕

글-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제2부 · 왕국의 심장

마흔여덟 번째 이야기 : 죽지 않은 왕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왕은 죽으면 명령을 남긴다. 그리고 어떤 명령은 주인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1. 죽은 자의 목소리

검은 탑은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었다.

회색 절벽 아래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구름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대한 탑 하나가 왕국과 바깥세계를 연결하듯 서 있었다.

탑의 꼭대기.

은빛 왕관을 쓴 남자가 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현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바람이 멎었다.

“죽은 것은 내 몸뿐이다.”

한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바라봤다.

도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

대답이 없었다.

“저게 누구예요?”

세이라가 대신 말했다.

“카르엔.”

“…왕의 이름인가요?”

“마지막으로 왕좌에 앉았던 자.”

한은 다시 탑을 바라봤다.

카르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상했다.

왕국의 모든 역사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왕들의 이름도 외웠다.

하지만 카르엔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왜 역사에 없는 거죠?”

세이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 이름부터 지웠으니까.”


2. 왕이 이름을 지운 이유

카르엔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왕관에서 붉은 빛이 퍼졌다.

절벽 앞에 무릎 꿇고 있던 봉인 기사단이 동시에 일어섰다.

철컥.

수백 개의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가 하나의 굉음처럼 울렸다.

한은 검을 움켜쥐었다.

“왕이 죽었는데도 저들이 명령을 따르는 이유가…”

“왕관 때문이다.”

세이라가 말했다.

“왕국에서 왕은 사람이 아니야.”

“무슨 뜻이죠?”

“왕관을 쓴 순간부터 왕은 하나의 명령이 돼.”

세이라는 한을 보았다.

“몸이 죽어도 명령은 왕좌에 남아.”

한은 46화에서 보았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

얼굴을 잃고 명령만 남은 자들.

그렇다면 왕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훨씬 거대한 명령이었을 뿐.

도현이 낮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실패했다.”

한의 시선이 돌아갔다.

“왕을 죽였는데도요?”

“나는 카르엔의 몸을 죽였다.”

도현은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왕관을 죽이지 못했어.”


3. 열세 번째 선

갑자기 한의 가슴이 타들어 갔다.

“윽!”

그가 무릎을 꿇었다.

옷 아래 붉은 인장이 강하게 빛났다.

열두 개의 선.

그리고 새로 생긴 열세 번째 선.

그 선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열두 개는 시계 방향.

열세 번째는 반대 방향.

세이라가 한 앞에 앉았다.

“움직이지 마.”

그녀가 인장 위에 손을 올렸다.

순간 세이라의 손이 튕겨 나갔다.

“아!”

손바닥이 붉게 그을렸다.

도현이 놀라 다가왔다.

“왜 그러지?”

세이라는 자신의 손보다 한의 인장을 바라봤다.

“이건 왕인의 인장이 아니야.”

“뭐?”

“정확히는…”

그녀가 말을 멈췄다.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인장이 아니야.”

한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럼 뭔데요?”

세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4. 지워진 열세 번째 문장

세이라는 책장을 뒤졌다.

책 수십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침내 가장 아래쪽에서 얇은 석판 하나를 꺼냈다.

먼지를 닦았다.

열두 개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첫 번째.

기억을 지켜라.

두 번째.

시간을 소유하지 마라.

세 번째.

죽음을 되돌리지 마라.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모두 첫 번째 후계자들이 했던 맹세였다.

마지막 열두 번째 문장.

왕이 되지 마라.

한은 석판을 바라봤다.

“열세 번째는 없잖아요.”

“있었어.”

세이라가 석판을 뒤집었다.

뒷면 한쪽이 인위적으로 깎여 있었다.

누군가 문장을 지운 흔적.

그녀는 손가락으로 홈을 더듬었다.

“왕이 지웠어.”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요?”

세이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의 인장이 반응했다.

열세 번째 선이 붉게 빛났다.

석판에서 지워졌던 글자가 하나씩 되살아났다.

한 글자.

또 한 글자.

마침내 문장이 완성됐다.

필요하다면 왕국을 끝내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5. 후계자의 진짜 의미

“왕국을…”

한의 입에서 겨우 말이 나왔다.

“…끝내라고?”

세이라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도현조차 처음 보는 문장인 듯했다.

“그래서 지웠던 거군.”

세이라가 중얼거렸다.

“뭘요?”

“후계자의 목적.”

그녀는 석판을 들어 올렸다.

“우리는 계속 잘못 알고 있었어.”

후계자는 왕위를 잇는 사람.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만들어진 후계자들은 왕좌를 계승하기 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기록수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

시간이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감시자들.

그리고 마지막 수단.

왕국이 시간을 집어삼키는 존재가 되는 날.

왕국 자체를 끝낼 권한을 가진 자들.

“후계자가 왕을 계승하는 게 아니야.”

세이라가 말했다.

“왕을 막는 존재였어.”

한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뒤집혔다.

왜 왕들은 후계자를 두려워했는지.

왜 실패한 후계자들을 심연에 가뒀는지.

왜 이름을 지웠는지.

왜 왕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는지.

처음부터 후계자는 왕의 자식이 아니었다.

왕의 천적이었다.


6. 왕관의 유혹

웃음소리가 들렸다.

카르엔이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지.”

그의 목소리는 절벽 전체에서 울렸다.

“후계자는 왕을 막는다.”

“왕국을 끝낼 권리가 있다.”

“자유를 되찾는다.”

카르엔이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그런데 한 가지를 빼먹었군.”

검은 탑 아래 구름이 걷혔다.

한은 말을 잃었다.

탑 아래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천.

수만.

아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

노인.

병사.

상인.

왕국 사람들이었다.

모두 잠든 채 검은 탑 주변에 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도현이 신음했다.

“왕국의 시간에 묶인 사람들이다.”

카르엔이 말했다.

“왕국을 끝내면.”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한 아이의 모습이 모래로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저들도 끝난다.”

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7. 가장 잔인한 선택

“거짓말이야.”

한이 말했다.

카르엔은 웃었다.

“확인해 볼까?”

왕관이 빛났다.

한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엄마.’

‘살고 싶어요.’

‘아직 죽기 싫어.’

‘조금만 더.’

한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수십만 명의 기억.

왕국 사람들의 삶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첫걸음을 뗀 아이.

결혼식을 앞둔 연인.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병사.

딸의 생일 선물을 준비한 아버지.

모두 살아 있었다.

모두 왕국의 시간에 묶여 있었다.

카르엔이 속삭였다.

“네가 왕국을 끝내면 저들은 죽는다.”

“네가 왕이 되면 저들은 산다.”

너무 단순했다.

그래서 잔인했다.


8. 도현의 대답

한이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라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 겨우 물었다.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도현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한에게 답을 주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처럼 오래 침묵했다.

“나는 선택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래서 실패한 후계자가 됐다.”

“가족도 살리고 싶었고.”

“왕국도 살리고 싶었고.”

“누구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도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모든 것을 다음 사람에게 미뤘지.”

그의 눈이 한을 향했다.

“너에게.”

한은 처음으로 아버지가 작아 보였다.

왕을 죽인 사람도.

자신을 구한 사람도.

완벽한 영웅이 아니었다.

선택하지 못한 한 사람이었다.


9. 세이라의 경고

세이라가 갑자기 한의 팔을 잡았다.

“듣지 마.”

“뭘요?”

“왕관은 선택지를 두 개만 보여줘.”

그녀가 카르엔을 노려봤다.

“항상 그랬어.”

왕국을 유지하거나.

왕국을 파괴하거나.

왕이 되거나.

모두 죽게 하거나.

“그게 왕관이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이야.”

한의 눈빛이 변했다.

“두 개밖에 없는 것처럼?”

“그래.”

“그럼 세 번째 방법이 있다는 거네요.”

세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에는 이전과 다른 의미가 있었다.

모른다.

그러나 없다고 증명된 적도 없다.


10. 열세 번째 후계자의 질문

한은 다시 석판을 바라봤다.

필요하다면 왕국을 끝내라.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끝낸다.’

파괴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한은 이상함을 느꼈다.

첫 번째 후계자들은 말을 매우 정확하게 사용했다.

시간을 ‘훔치지 마라.’

죽음을 ‘되돌리지 마라.’

왕이 ‘되지 마라.’

그런데 왜 마지막 문장만.

파괴하라가 아니라 끝내라였을까?

한은 고개를 들었다.

“세이라.”

“왜?”

“왕국이 생기기 전에는 뭐라고 했죠?”

“기록의 정원.”

“그러면…”

한은 천천히 카르엔을 바라봤다.

“왕국만 끝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카르엔의 웃음이 멈췄다.

처음이었다.

죽지 않은 왕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11. 왕이 두려워한 말

“왕국을 없애고.”

한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사람들을 밖으로 보내면?”

카르엔의 왕관이 흔들렸다.

“입 닥쳐라.”

“왕국이 아니라 다시 기록의 정원으로 돌아가면?”

“닥쳐!”

검은 탑이 흔들렸다.

구름 속 번개가 떨어졌다.

봉인 기사단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는 길을 막은 거구나.”

“한!”

“사람들이 밖에서도 살 수 있다는 걸 알면.”

한은 검을 뽑았다.

“왕이 필요 없어지니까.”

카르엔이 처음으로 분노했다.

“죽여라!”


12. 명령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

봉인 기사단이 달려들었다.

도현이 검을 뽑았다.

세이라도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가장 앞에 있던 기사가 멈췄다.

369번째 후계자의 얼굴을 가진 기사였다.

검이 떨렸다.

카르엔이 다시 명령했다.

“죽여라!”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을 집행하라!”

그의 손이 천천히 투구로 향했다.

투구를 벗었다.

이번에는 안개가 아니었다.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나이가 많은 남자.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억났다.”

그가 말했다.

카르엔의 얼굴이 굳었다.

“내 이름.”

기사는 자신의 가슴에 검을 가져갔다.

그리고 갑옷에 새겨진 봉인의 인장을 베었다.

붉은 빛이 터졌다.

“내 이름은 라온.”

그 순간.

뒤에 있던 기사 한 명이 투구를 벗었다.

“세르.”

또 한 명.

“미아.”

또 한 명.

“테온.”

이름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 명.

열 명.

백 명.

절벽 위에서 수백 개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왕의 명령이 흔들렸다.


마지막 장면

카르엔이 왕관을 움켜쥐었다.

“그만!”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름을 되찾은 기사들의 갑옷에서 봉인의 문양이 하나씩 사라졌다.

그리고 한의 열세 번째 인장이 완성됐다.

열세 개의 선이 처음으로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회색 절벽이 갈라졌다.

그 아래에서 거대한 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잘려나갔다고 믿었던 기록수의 뿌리였다.

그 뿌리는 왕국을 향하지 않았다.

절벽을 넘어.

바깥세계 전체로 이어져 있었다.

세이라가 그것을 보며 숨을 삼켰다.

“기록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죽은 적이 없었어.”

그 순간 한의 발밑에서 새싹 하나가 돋아났다.

작고 연약한 초록빛 새싹.

하지만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죽지 않은 왕 카르엔은 처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번째 기록수가 깨어난다.”


다음 이야기 예고 · 제49화 《두 번째 기록수》

죽었다고 믿었던 기록수는 왕국 밖에서 살아 있었다. 한의 열세 번째 인장이 깨어나며 새로운 기록수가 싹트기 시작하고, 세이라는 열세 번째 후계자가 존재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를 밝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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