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 소설 & 창작소/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마흔아홉 번째 이야기 : 두 번째 기록수

글-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제2부 · 왕국의 심장

마흔아홉 번째 이야기 : 두 번째 기록수

“새로운 나무가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생긴다는 뜻이 아니다. 누군가 정해 놓은 미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1. 절벽에서 돋아난 새싹

새싹은 너무 작았다.

손가락 하나보다도 작고, 줄기는 조금만 세게 건드려도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한.

도현.

세이라.

그리고 이름을 되찾기 시작한 봉인 기사들까지.

모두가 그 작은 새싹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지 않은 왕 카르엔조차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백 명의 봉인 기사를 명령 하나로 움직이던 그가 처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밟아라.”

카르엔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것을 없애!”

왕관에서 붉은 빛이 터졌다.

몇몇 기사의 갑옷에 남아 있던 봉인의 문양이 강제로 빛났다.

기사들의 몸이 앞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가장 앞에 있던 라온이 검을 땅에 꽂았다.

쾅!

“싫다.”

짧은 한마디였다.

카르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감히 왕의 명령을—”

“내 이름은 라온이다.”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봉인기사 17호가 아니야.”

그 순간 그의 갑옷에 새겨진 마지막 붉은 문양이 깨졌다.

철컥.

검은 갑옷 한 조각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아래에는 평범한 인간의 손이 있었다.

늙고 상처투성이인 손.

하지만 살아 있는 손이었다.


2. 왕이 두려워하는 것

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작은 나무가 그렇게 위험한 겁니까?”

세이라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싹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감히 만질 수 없다는 듯.

“위험한 게 아니야.”

“그럼?”

세이라가 카르엔을 바라봤다.

“왕에게 필요 없는 거지.”

“무슨 뜻이에요?”

“첫 번째 기록수는 시간을 기록했어.”

세이라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절벽 아래 드러난 거대한 뿌리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어난 순간.”

“살았던 순간.”

“죽었던 순간.”

“이미 일어난 모든 것을 기록했지.”

“그런데 두 번째 기록수는 달라.”

한의 가슴에서 열세 번째 인장이 뜨거워졌다.

“뭘 기록하는데요?”

세이라가 한을 바라봤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3. 기록되지 않은 미래

한은 잠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래를 기록한다고요?”

“아니.”

세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야.”

“미래를 비워 둬.”

한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떠올렸다.

회색 절벽 오두막에서 봤던 책.

첫 장만 적혀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비어 있었다.

왕력 842년. 시간의 미궁으로 들어갔다.

그 뒤는 백지였다.

세이라가 말했다.

“왕국 안에서는 미래가 이미 기록돼 있어.”

“누가 기록하는데요?”

“왕좌.”

한은 카르엔을 바라봤다.

카르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좌는 미래를 예언하는 게 아니야.”

세이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미래를 정하는 거야.”

그 말이 한의 머리를 때렸다.

예언.

마지막 후계자.

왕국을 끝내는 자.

실패한 후계자들.

그 모든 것이 미래를 본 것이 아니라면?

“설마…”

“그래.”

세이라가 말했다.

“왕좌는 가능한 미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가능성을 지워.”


4. 369명의 실패

한은 심연에서 보았던 수많은 손을 떠올렸다.

369명의 실패한 후계자.

그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수백 명이 모두 실패할 수 있을까.

어떻게 왕국은 매번 같은 비극을 반복할 수 있었을까.

“실패한 게 아니었군.”

한이 중얼거렸다.

도현이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냐?”

“처음부터 실패하게 만든 거예요.”

침묵이 흘렀다.

한은 카르엔을 노려봤다.

“왕좌가.”

카르엔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세이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계자가 왕좌를 거부하면 왕국의 시간이 갈라져.”

“새로운 미래가 생겨.”

“왕에게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지.”

“그래서?”

“그 미래를 잘라내.”

한의 손이 떨렸다.

369명.

그들은 무능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선택할 기회를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5. 열세 번째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

“그런데 왜 나는 달라요?”

한이 물었다.

“왜 열세 번째 선이 생긴 거죠?”

세이라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새싹 옆의 흙을 손으로 걷어냈다.

작은 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뿌리는 왕국 쪽으로 뻗지 않았다.

반대였다.

바깥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세이라가 말했다.

“첫 번째 후계자는 열두 명이었어.”

“그건 알고 있어요.”

“아니.”

세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돌조각 하나를 꺼냈다.

48화에서 발견한 맹세의 석판과 같은 재질이었다.

돌조각을 석판의 깎여 나간 부분에 맞췄다.

딱.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리고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열둘은 기록을 지킨다.

그 아래.

마지막 하나는 기록되지 않는다.

한의 심장이 빨라졌다.

“열세 번째가 처음부터 있었다는 겁니까?”

“있었어.”

“그럼 왜 아무도…”

“왕이 지웠으니까.”


6.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

세이라가 석판을 뒤집었다.

아주 작은 이름 하나가 나타났다.

하지만 절반이 지워져 있었다.

아…

두 번째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구예요?”

“나도 몰라.”

세이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사람은 첫 번째 열세 번째 후계자였어.”

“아린이 아니고?”

“아린은 첫 번째 후계자.”

세이라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린이 왕이 된 날 사라졌어.”

도현이 물었다.

“죽은 건가?”

“모르겠어.”

“기록이 없어.”

세이라가 한을 바라봤다.

“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기록수에는 모든 사람의 삶이 남는다.

죽은 사람도.

사라진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그런데 이 사람만 없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7. 카르엔의 공격

“충분하다.”

카르엔의 목소리가 울렸다.

검은 탑이 크게 흔들렸다.

왕관에서 붉은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목표는 한이 아니었다.

새싹.

“안 돼!”

한이 몸을 던졌다.

빛줄기가 떨어졌다.

콰아앙!

회색 절벽이 갈라졌다.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도현이 한을 끌어냈다.

“괜찮냐?”

한은 곧바로 새싹을 찾았다.

연기 사이.

작은 초록빛이 보였다.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새싹 주변에 누군가 서 있었다.

작은 아이였다.


8. 나무에서 나온 아이

열 살 정도.

맨발.

낡은 흰옷.

머리카락은 한쪽이 검고 다른 쪽이 새하얬다.

아이는 새싹 앞에 서서 카르엔의 공격을 한 손으로 막고 있었다.

한은 움직이지 못했다.

세이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한쪽 눈은 금빛.

다른 한쪽은 검은색이었다.

아르아와 닮았다.

하지만 아르아는 아니었다.

“누구야?”

한이 물었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을 위아래로 살펴봤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뭐가?”

“왜 네가 가지고 있지?”

“뭘?”

아이가 한의 가슴을 가리켰다.

“내 인장.”


9. 열세 번째 인장의 주인

세이라가 앞으로 나왔다.

“너는 누구지?”

아이가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세이라?”

세이라의 얼굴이 굳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봤으니까.”

“어디서?”

아이는 새싹을 가리켰다.

“기록에서.”

“하지만 이 나무는 방금…”

“방금 태어난 게 아니야.”

아이가 말했다.

“다시 태어난 거야.”

한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두 번째 기록수.

그 말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다.

두 번째가 아니라면.

“설마…”

아이가 웃었다.

“이제 알겠어?”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보여줬다.

희미한 문양 하나가 있었다.

열세 개의 선.

한과 똑같았다.


10. 첫 번째 열세 번째 후계자

카르엔이 비명을 질렀다.

“그 아이를 없애!”

한은 처음으로 카르엔의 목소리에서 명백한 공포를 들었다.

봉인 기사단은 움직이지 않았다.

카르엔이 다시 소리쳤다.

“죽여라!”

아이는 귀찮다는 듯 검은 탑을 올려다봤다.

“아직도 살아 있었네.”

카르엔의 표정이 굳었다.

“너…”

아이가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야.”

“아린.”

그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

한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아린?”

“저건 카르엔인데…”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카르엔?”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이해한 듯 웃었다.

“아.”

“또 이름을 바꿨구나.”


11. 왕의 첫 번째 이름

도현의 검이 천천히 내려갔다.

세이라도 말을 잃었다.

“무슨 뜻이지?”

아이가 검은 탑을 바라봤다.

“아린은 죽지 않았어.”

한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지만 초대 후계자는…”

“왕이 되었지.”

“그리고?”

아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왕은 몸을 바꾸면서 계속 살아왔어.”

왕조.

수십 명의 왕.

서로 다른 이름.

서로 다른 얼굴.

한은 지금까지 본 왕들의 벽화를 떠올렸다.

그 모든 왕이 사실은…

“한 사람이었다고?”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관이 몸을 옮긴 거야.”

“왕이 바뀐 게 아니라.”

“몸이 바뀐 거지.”

카르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 닥쳐.”

아이는 웃었다.

“왜?”

“네가 가장 좋아했던 말이잖아.”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왕국은 영원해야 한다.”


12. 왕국이 반복된 이유

모든 것이 연결됐다.

왕들이 같은 선택을 한 이유.

후계자들이 계속 실패한 이유.

왕국의 정책이 수백 년 동안 바뀌지 않은 이유.

왕관은 단순한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다.

아린의 의지를 보존하는 그릇.

몸이 늙으면 다른 몸으로.

왕이 죽으면 다음 왕에게.

수백 년 동안.

한 사람의 선택이 왕국 전체의 미래를 붙잡고 있었다.

한은 검을 들어 카르엔을 겨눴다.

“당신이…”

목소리가 떨렸다.

“모든 왕이었어?”

카르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면 충분했다.


13. 아이의 이름

한은 아이를 바라봤다.

“그럼 너는?”

아이가 잠시 고민했다.

“내 이름?”

“그래.”

아이는 석판을 바라봤다.

지워진 이름.

아…

그리고 말했다.

“아직 기억이 다 돌아오지는 않았어.”

“그래도 하나는 기억나.”

아이가 한에게 다가왔다.

키가 작아 한을 올려다봐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은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산 존재를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왕이 되지 않은 후계자.”

아이의 손이 한의 가슴에 닿았다.

열세 번째 인장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네가 가진 건 원래…”

순간.

한의 인장에서 빛이 폭발했다.

아이의 가슴에 있던 희미한 문양도 함께 빛났다.

두 인장이 서로를 향해 움직였다.

세이라가 소리쳤다.

“떨어져!”

늦었다.


마지막 장면

한의 머릿속으로 낯선 기억이 밀려들었다.

기록수.

아르아.

젊은 아린.

그리고 또 한 명의 아이.

세 사람이 함께 웃고 있었다.

아린이 아이에게 말했다.

“형이 왕이 되더라도 네가 막아 줘.”

아이가 웃었다.

“형이 왕이 될 리가 없잖아.”

“혹시 모르니까.”

아린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이 걸렸다.

“약속이다.”

기억이 바뀌었다.

왕관을 쓴 아린.

피투성이가 된 아이.

불타는 기록수.

아이가 마지막 힘으로 자신의 인장을 뜯어냈다.

그리고 기록수 뿌리 속으로 던졌다.

아린이 소리쳤다.

“아온!”

순간 기억이 끊겼다.

한은 바닥에 쓰러졌다.

귓가에 이름 하나만 남았다.

아온.

눈을 뜨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기억났다.”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아온.”

그리고 검은 탑 위의 카르엔을 바라봤다.

“저 사람은 내 형이야.”

바람이 멈췄다.

카르엔.

아니.

초대 후계자 아린이 수백 년 만에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 예고 · 제50화 《왕이 되지 않은 동생》

첫 번째 열세 번째 후계자 아온의 기억이 돌아온다. 아린이 왕관을 쓰던 날 형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한에게 아온의 인장이 넘어간 이유가 밝혀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