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제2부 · 왕국의 심장
쉰한 번째 이야기 : 기록수의 무덤
“고향은 태어난 곳이 아니다. 내가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기다리는 곳이다.”
1. 왕국의 마지막 한 걸음
회색 절벽의 끝.
한은 한동안 발을 내딛지 못했다.
눈앞에는 돌계단이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계단.
왕국과 바깥세계를 연결하는 길이었다.
불과 열 걸음.
그러나 그 열 걸음이 한에게는 시간의 미궁보다 멀게 느껴졌다.
계단 너머에는 푸른 하늘이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하늘인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풀 냄새.
흙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꽃 냄새.
한은 눈을 감았다.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었다.
“한.”
도현의 목소리였다.
한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죠?”
침묵.
“제가 어디서 왔는지.”
“…그래.”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것도.”
“그래.”
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왜 말하지 않았는지.
왜 자신을 시간의 미궁으로 보냈는지.
왜 어머니와 떨어뜨렸는지.
하지만 지금 물어봐도 도현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은 첫 번째 계단을 밟았다.
그 순간.
뒤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쩌적.
왕국의 은빛 하늘에 금이 가고 있었다.
세이라가 말했다.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어.”
2. 바깥세계
열 번째 계단을 밟는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소리가 먼저 달라졌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
왕국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소리들이었다.
한은 땅을 밟았다.
진짜 흙이었다.
발끝으로 흙을 눌러 보았다.
부드러웠다.
왕국의 땅처럼 차갑지도 않았다.
“여기가…”
한은 말을 잇지 못했다.
끝없는 숲.
멀리 흐르는 강.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 떼.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모든 것이 움직였다.
왕국처럼 반복되지 않았다.
바람은 같은 방향으로 두 번 불지 않았다.
구름은 흘러갔다.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정말로 앞으로 가고 있었다.
아온이 뒤에서 말했다.
“이게 시간이야.”
한이 돌아봤다.
“왕국에도 시간은 있었잖아.”
아온이 고개를 저었다.
“왕국에는 순서가 있었지.”
“순서?”
“아침 다음에 낮이 오고, 낮 다음에 밤이 오는 것.”
아온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아니야.”
“그럼?”
“시간은…”
아온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다시는 똑같이 돌아오지 않는 것.”
3. 건너지 못한 사람
한은 뒤를 돌아봤다.
세이라가 경계를 넘어오고 있었다.
도현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라온과 봉인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절벽 끝에 서 있을 뿐이었다.
“왜 안 와요?”
라온이 희미하게 웃었다.
“우리는 못 간다.”
“이름을 되찾았잖아요.”
“이름만 되찾았지.”
라온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갑옷 아래 희미한 봉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리의 시간은 이미 왕국에 묶였다.”
“그럼…”
“걱정 마라.”
라온은 뒤를 돌아봤다.
수백 명의 기사들이 왕국을 향해 서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까.”
은빛 하늘의 균열 너머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카르엔의 군대였다.
라온이 검을 뽑았다.
“왕이 너를 따라가지 못하게 막겠다.”
한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라온이 웃었다.
“미래가 비어 있다며?”
그리고 검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가능하겠지.”
4. 세이라가 숨긴 지도
그들은 숲으로 들어갔다.
세이라가 앞장섰다.
“기록수의 무덤까지 얼마나 걸려요?”
“보통 사람이라면 스무 날.”
한이 걸음을 멈췄다.
“스무 날?”
“말이 있으면 일주일.”
“말은?”
“없지.”
아온이 말했다.
“그럼 스무 날 걸으면 되겠네.”
세이라가 피식 웃었다.
“네가 수백 년 만에 살아났다는 걸 깜빡했구나.”
그녀는 품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과거.
현재.
미래.
밖.
네 방향이 적힌 나침반.
바늘이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 한쪽에서 멈췄다.
밖.
“이건 방향을 알려주는 물건이 아니야.”
세이라가 말했다.
“그럼요?”
“경계를 찾는 물건이지.”
그녀가 나침반을 땅에 내려놓았다.
바늘이 빛났다.
숲 사이에 없던 길이 나타났다.
검은 나무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너머에는 돌로 만든 오래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이 길을 쓰면 사흘.”
한이 세이라를 바라봤다.
“왜 아까 스무 날이라고 했어요?”
“네가 얼마나 급한지 보고 싶었어.”
“……”
아온이 웃었다.
“나 이 누나 마음에 드는데.”
세이라가 아온의 머리를 툭 쳤다.
“누나라 부르지 마. 내가 네 조카뻘이야.”
아온의 얼굴이 굳었다.
한이 처음으로 웃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5. 왕국 밖의 사람들
길을 걷기 시작한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연기가 보였다.
“불인가?”
한이 검에 손을 가져갔다.
세이라가 막았다.
“굴뚝 연기야.”
나무 사이로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상인들이 물건을 팔았다.
빨래가 바람에 흔들렸다.
너무 평범했다.
그래서 한은 오히려 멈춰 섰다.
왕국 밖에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도에서도 봤다.
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한 아이가 그들 곁을 지나가다 넘어졌다.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달려와 아이를 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한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왜 그래?”
도현이 물었다.
“그냥…”
한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아이의 시간이 왕국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다.
저 어머니가 살아야 할 하루가 누군가의 수명을 늘리는 데 사용됐을 수도 있다.
왕국 사람들은 몰랐다.
이 사람들도 몰랐다.
세이라가 한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하지만 왕국은…”
“네가 만든 게 아니야.”
한이 그녀를 바라봤다.
세이라가 덧붙였다.
“대신 알게 된 뒤 무엇을 할지는 네 몫이지.”
6. 왕국을 아는 노인
그들이 마을을 지나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늙은 남자가 한을 불렀다.
한쪽 눈이 없는 노인이었다.
그의 시선은 한의 검에 꽂혀 있었다.
정확히는 검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
“그 문양…”
세이라가 한 앞을 막았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 눈 모양을 내가 어떻게 잊어.”
왕인의 인장.
한의 표정이 굳었다.
“왕국을 아십니까?”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왕국?”
그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름을 여기서 말하지 마.”
7. 사라지는 마을들
노인은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벽에는 지도가 걸려 있었다.
지도 곳곳에 검은 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도현이 물었다.
“사라진 마을.”
한이 지도를 바라봤다.
“전쟁 때문에요?”
“아니.”
“역병?”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사라져.”
“사람들이요?”
“사람도. 집도. 이름도.”
노인의 손이 떨렸다.
“더 무서운 건 주변 사람들이 그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는 거야.”
한과 도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기록의 삭제.
왕국에서 벌어진 일과 같았다.
노인이 검은 점 하나를 가리켰다.
“내 고향도 그랬다.”
“어떻게 기억하죠?”
“나는 그날 마을 밖에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세이라가 말했다.
노인은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목에 걸린 목걸이를 꺼냈다.
나뭇잎 모양이었다.
한의 숨이 멎었다.
기억 속에서 봤다.
자신의 어머니가 하고 있던 것과 같은 모양.
“이걸 가진 사람들은 기억을 잃지 않아.”
“누가 줬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무덤지기.”
8. 무덤지기
한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사람이 여자였습니까?”
“그래.”
“금빛 눈?”
노인의 표정이 변했다.
“아는 사람인가?”
“이름은?”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말하지 않았어.”
한의 심장이 뛰었다.
“어디서 만났습니까?”
“북쪽.”
노인은 지도 끝을 가리켰다.
검은 숲.
그 중심에 아무 표시도 없는 거대한 공백이 있었다.
“사람들은 저곳을 기록수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왜 무덤이죠?”
노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들어간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하나씩 잃거든.”
한은 세이라를 바라봤다.
세이라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했다.
노인이 말했다.
“이름.”
“가족.”
“사랑했던 사람.”
“마지막에는 자신이 왜 그곳에 왔는지도 잊어.”
아온이 물었다.
“그런 곳을 왜 지키는데?”
노인이 대답했다.
“안에 있는 것이 나오지 못하게.”
9. 무덤 속에 있는 것
밤이 되었다.
일행은 노인의 집에서 쉬기로 했다.
하지만 한은 잠들지 못했다.
밖으로 나왔다.
도현이 우물 옆에 앉아 있었다.
한은 아버지 옆에 앉지 않았다.
조금 떨어져 섰다.
“아버지.”
“그래.”
“어머니 이름.”
도현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말해 주세요.”
긴 침묵.
“유라.”
한의 입술이 움직였다.
“유라…”
처음 듣는 이름인데 가슴 어딘가가 아팠다.
“어떤 사람이었어요?”
도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너랑 닮았다.”
“얼굴이요?”
“고집이.”
한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러다 다시 진지해졌다.
“왜 저곳을 지키고 있어요?”
도현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건…”
그때 집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10. 지워진 이름
한과 도현이 뛰어 들어갔다.
노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세이라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도!”
벽을 바라봤다.
검은 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나.
둘.
열.
수십 개.
마을들이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왔어…”
“뭐가요?”
“저것이…”
마을 끝에서 검은 안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개가 집 하나를 삼켰다.
집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조차.
옆집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사라진 집터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갔다.
기억하지 못했다.
한의 가슴에서 인장이 빛났다.
아온이 중얼거렸다.
“이건 심연이 아니야.”
세이라가 물었다.
“그럼?”
아온의 얼굴이 굳었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다.”
11. 어머니의 편지
노인이 갑자기 한의 손을 붙잡았다.
“혹시…”
그가 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네 이름이 한이냐?”
한의 몸이 굳었다.
“어떻게…”
노인은 급하게 침대 밑을 뒤졌다.
낡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십오 년 전에 맡았다.”
상자 안에는 편지가 있었다.
봉투 앞에 한 글자.
한.
손이 떨렸다.
한은 편지를 열었다.
짧았다.
한아.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결국 여기까지 온 거겠지.
나를 찾으러 바로 오지 않았으면 한다.
한의 눈썹이 움직였다.
다음 문장.
기록수의 무덤에는 네가 알고 있는 나와 다른 내가 있다.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만나더라도 먼저 이것을 물어라.
“내가 태어난 날, 엄마는 내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대답하지 못하면 도망쳐라.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다.
한은 편지를 움켜쥐었다.
12. 검은 비
다음 날 새벽.
그들은 마을을 떠났다.
노인은 나뭇잎 목걸이를 한에게 건넸다.
“가져가.”
“하지만 이게 없으면 기억을…”
“나는 늙었어.”
노인이 웃었다.
“잊어도 될 게 많지.”
한은 받지 않으려 했다.
노인이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넌 아직 기억해야 할 게 많아 보여.”
그들은 북쪽으로 향했다.
첫날.
숲의 나무들이 점점 검어졌다.
둘째 날.
새소리가 사라졌다.
셋째 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비였다.
빗방울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아주 작은 기억 하나가 사라졌다.
한은 처음 먹었던 음식의 맛을 잊었다.
어릴 적 살았던 방의 창문 모양을 잊었다.
도윤이 처음 가르쳐 준 글자의 순서를 잊었다.
나뭇잎 목걸이가 빛날 때마다 기억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서둘러!”
세이라가 외쳤다.
숲 끝에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13. 기록수의 무덤
산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것이 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거대한 나무.
줄기만으로 작은 도시 하나를 덮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죽어 있었다.
잎은 하나도 없었다.
가지들은 하늘을 찌르듯 말라붙어 있었다.
뿌리 주변에는 수천 개의 비석이 서 있었다.
그런데 비석에는 이름이 없었다.
전부 비어 있었다.
아온이 멈춰 섰다.
“여기…”
아이의 몸이 떨렸다.
“기억나.”
“뭐가?”
“첫 번째 기록수.”
아온이 죽은 나무를 바라봤다.
“여기서 죽은 게 아니야.”
한이 물었다.
“그럼?”
아온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여기로 옮겨진 거야.”
“누가?”
아온이 대답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14. 기다리고 있던 여자
죽은 기록수 뒤에서 여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
금빛 눈.
목에는 나뭇잎 목걸이.
한은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기억에서 봤던 여자.
도현에게 자신을 맡겼던 사람.
세월이 흘렀지만 얼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도현이 중얼거렸다.
“유라…”
여자의 눈이 도현을 지나 한에게 향했다.
눈물이 고였다.
“많이 컸구나.”
한은 움직이지 못했다.
평생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단어가 목에서 걸렸다.
“…어머니?”
유라가 웃었다.
“그래.”
한 걸음.
두 걸음.
그녀가 다가왔다.
한도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멈췄다.
편지가 떠올랐다.
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유라가 미소 지었다.
“그래.”
한은 편지에 적힌 질문을 그대로 말했다.
“제가 태어난 날.”
“어머니는 저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유라의 미소가 멈췄다.
침묵.
하나.
둘.
셋.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구나.”
한이 검을 뽑았다.
“당신은 누구야?”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렸다.
웃고 있었다.
“정말 지독한 여자야.”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그 얼굴은 더 이상 유라의 얼굴이 아니었다.
검은 균열이 얼굴 전체로 퍼졌다.
“자기 아들에게까지 나를 의심하게 만들다니.”
15. 무덤의 주인
수천 개의 비석이 동시에 흔들렸다.
쿵.
쿵.
쿵.
비어 있던 비석마다 글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수십.
수백.
수천.
그리고 그 이름들이 하나씩 지워졌다.
아온이 뒤로 물러났다.
“도망쳐.”
세이라가 검을 뽑았다.
“뭔데?”
아온은 죽은 기록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이 시간을 훔치면 빈자리가 생긴다고 했지?”
“심연.”
“그래.”
아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시간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억 자체를 빼앗으면 무엇이 남을까?”
죽은 기록수의 줄기에 거대한 눈 하나가 떠올랐다.
한을 바라봤다.
“망각.”
그 목소리가 숲 전체를 흔들었다.
“나는 심연보다 먼저 태어났다.”
“기록이 생긴 순간.”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한은 검을 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디 있어?”
괴물이 유라의 얼굴로 다시 웃었다.
“살아 있다.”
한의 심장이 뛰었다.
“어디?”
괴물의 손가락이 아래를 향했다.
죽은 기록수의 뿌리.
땅속.
“내 안에.”
마지막 장면
땅이 갈라졌다.
죽은 기록수 아래로 거대한 공동이 드러났다.
그리고 한은 보았다.
수천 개의 투명한 뿌리.
각각의 뿌리 안에 사람이 한 명씩 잠들어 있었다.
잊힌 사람들.
기록에서 사라진 사람들.
존재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중 가장 깊은 곳.
한 여자가 눈을 감고 있었다.
검은 머리.
금빛 눈.
목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한의 손에 들린 나뭇잎 목걸이가 강하게 빛났다.
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라…”
이번에는 진짜였다.
그 순간 유라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한을 바라봤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은 분명히 읽었다.
도망쳐.
그리고 그 뒤.
유라보다 훨씬 깊은 뿌리 속에서—
또 다른 사람이 눈을 떴다.
한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한은 얼어붙었다.
뿌리 속의 남자가 웃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드디어 왔구나.”
“나의 다음 기억.”
다음 이야기 예고 · 제52화 《한이라는 이름》
기록수의 무덤 아래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한’. 그는 369번째 후계자의 잔재인가, 한의 과거인가, 아니면 왕국이 감춰 온 전혀 다른 존재인가. 유라를 구하기 위해 무덤으로 내려간 한은 마침내 자신이 왕국 밖에서 태어난 이유와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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